언어는 권력이다.
그 중요한 사실을 이제껏 언어가 되는 나라만 다녀서 몰랐던 것이죠.. 그런데 갑자기 파파고조차 외면한 나라를 여행하려니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니죠..
블라디보스톡 여행 내내 어떻게든 다 해결해주는 JD의 등 뒤에서 '나는 러시아어를 모름미다=.=?' 하는 순진한 얼굴로 그의 오더만 기다리며 수동형 인간으로 지낸 나는 사흘째 되던 날 조금 안심을 하게 된다. 왜냐면 역사에 관심이 많아진 나를 위해 JD가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줬거든!
크게 구경할 게 없는 동네라 하루 정도는 가이드 투어로 멀리 나가보자 해서 신청한 거였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좋았다. 뭐가 좋았냐 하면
1. 며칠 동안 자유여행 하면서 쌓였던 언어 스트레스가 없음
2. 지하철도 없고 버스는 탈 엄두도 안 나는 동네에서 자체 버스로 이동하니 편리함
3. 자유여행이었으면 못 먹어봤을 독특한 식사, 고려인 음식
4. 한국사검정능력시험 1급 가이드분의 친절한 설명
5. 역사설명 이외에도 사야 할 물건들 강요 없이 찐으로 알랴줌
(맛있는 과자, 저렴한 술집, 괜찮은 커피숍, 곰발바닥 식당 등)
1,2번은 당연한 거라지만 그마저도 간만에 느끼는 여유라 너무 좋았다. 젊은 사람은 무조건 자유여행을 해야 한다는 강압적 프리마인드는 더이상 노놉🙅♀️❌ 잘 아는 사람에게 설명을 잘 듣는 것도 좋은 여행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오마이블라디라는 곳을 예약했고, 자체 버스로1시간 30분 정도를 이동하여 우수리스크로 역사여행을 떠났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분이 러시아와 블라디보스톡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심.
1.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고택 (입장료 50루블, 가이드 투어 금액 포함)
우리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분. 노비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러시아에서 양부모를 만나 교육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쌓았다. 안중근 의사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분으로 그의 가족들을 죽기 전까지 돌봐주었다고. 1920년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했으나 아직도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페치카'는 '난로'라는 뜻으로 최재형 선생의 별명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따수우셨으면.. 참고로 <미스터 션샤인> 이병헌 역할의 모티브가 바로 최재형 선생이라고 한다.
최재형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4분짜리 짧은 영상을 보고, 사진도 한 방씩 찍고 자리를 떴다. 이렇게 중요한 독립운동가도 모르고 살아온 나의 무지함이 부끄러웠던 시간.
2.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 유허비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 선생,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려 했으나 한국 정부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받지 못해 발언권을 거부당하고 만다. 결국 회의장 밖에서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연설을 했다고. 가이드분께서 한국어로 그 연설문을 낭독해주셨고 마음이 뭉클해진 나는 오랫동안 묵념을 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힘쓰다 돌아가신 이상설 선생님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수이푼 강에 뿌려진다. 그리고 2001년 러시아 정부에게 협조를 얻어 세워진 이 비석. 비가 많이 올 때는 강물이 불어 여기까지 물이 차오른단다.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 하니 이번 투어 중 가장 많은 생각이 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투병 중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의 삶, 100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업적을 정확하게 알고, 또 널리 알리는 것.
3. 발해 성터
그리고 허허벌판인 이곳은 바로 발해 성터. 교과서에서만 봐왔던 발해를 내 눈에 담게 될 줄이야.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아무것도 없는 초원의 모습이었다.
사진 못 찍는 제이디가 하나 건져줬다. 배경이 다했죵...
그리고 피곤해서 사진을 못 찍은 게 하나 있는데, 어느 공원에서 비석 받침대로 사용된 발해의 유물 '거북이 석상'을 만지면 오래 산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여... 대가리를 슥슥 쓰다듬고 왔다. 오래 살 생각 없다면서 다들 만지니까 JD도 나도 한 번 만져봤다눙.
4. 고려인 문화센터
한인 이주 140년을 기념하여 설립된 고려인 문화센터, 이곳에서는 고려인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매달려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를 알고 나서도 과연 그들을 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그리고 마무리는 결국 아리랑으로 하나되는 우리.
+) 점심 = 고려인 음식
점심으로는 고려인 식당을 다녀왔다. 고려인 문화센터 바로 옆에 있는 가게였음. 평소에 우리가 먹는 것들과 특별히 다를 건 없지만 묘하게 간이 다른 것이 재미있었다. 꿔바로우가 조금 딱딱한 것과 두릅 튀김이 맛있었던 것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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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던, 그러나 역사에 무지한 내가 창피했던 투어였다. 가이드분께서 목이 나가도록 친절히 설명해주셨는데 내가 아는 게 너무 없어서 열심히는 들었으나 돌이켜보니 생각나는 게 많지 않다 _(:3」∠)_ 우리 가이드분 왕똑똑이에 왕친절이였는데 잘 좀 배워둘걸... 곧 역사책을 한 권 사서 공부할 생각인데 그때 공부하다 보면 잠시 잊었던 가이드님의 설명이 떠오를 것 같아서 설렌다 :) 늦지 않게 시작해야지.
역사덕후 엄마랑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역사 공부 더 많이 해서 다음엔 엄마랑 같이 올 것, 그땐 루스키섬 가서 인생샷도 찍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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