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정치적 동지이자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

By Kims - 11월 09, 2019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태종 이방원 역할을 맡은 배우 유아인

태종 이방원은 학자 집안으로 유명한 여흥 민씨 가문의 둘째 딸(훗날의 원경왕후)과 혼인했습니다. 성균관 대사성 민제의 사위 자리였습니다. 당시 민제의 둘째 딸은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인물도 출중하고 머리도 뛰어났습니다. 하긴 부모 집안이 모두 인물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았으니, 그 유전자가 어디 갔을까요.

이방원은 결혼할 당시 나이 열여섯 살이었고, 민씨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민씨는 학문도 뛰어났는데, 변계량이 쓴 《헌릉지獻陵誌》에는 민씨가 “맑고 아름다웠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시골 촌놈 이방원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도시 여인 민씨와 결혼했고, 그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민제의 둘째 딸에게 장가든 이방원은 처가살이를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 지속된 처가살이 동안 그에게는 좋은 일만 생겼습니다. 우선 결혼 이듬해인 1383년엔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비록 장원은 아니었지만 33 명 중 10등으로 성적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급제와 동시에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첫딸 정순공주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후에도 그는 처가에서 살았습니다. 급제는 했지만, 관직이 날 때까지는 백수 신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는 장인과 장모, 아내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태종은 훗날 “내가 어렸을 때, 민씨에게 자라서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의 이런 태도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방원은 정종에게 선위 받아 1400년 11월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부인 민씨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 역시 왕비 자리를 얻기 위해 이방원 못지않게 무섭게 달려왔고, 그 세월은 무려 1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18년 동안 남편은 오로지 정치에 열정을 쏟을 뿐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방원에게 여인은 오직 그녀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왕이 된 뒤, 이방원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달콤하고 열정적이었던 동지이자 연인관계는 그들이 궁궐에 들어간 순간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1400년, 왕위 계승권자로 확정되어 궁궐에 들어간 이방원은 바로 다른 ‘시앗’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다른 여자도 아닌 왕비 민씨의 궁녀였습니다. 이 일로 민씨는 화가 몹시 났습니다. 사실, 이방원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린 것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왕자 시절에 다른 여인과 동침하여 아들까지 얻은 바 있었습니다. 상대는 민씨의 몸종. 그 여인은 훗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뒤, 후궁에 책봉되었습니다(효빈 김씨. 그녀가 낳은 아들은 경녕군입니다).

이방원이 김씨와 정을 통했을 때는 민씨가 큰아들인 양녕대군을 잉태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민씨가 느끼는 배신감이 클 법 했지만 민씨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양반가에서 첩을 한둘 두는 것은 예사인 시절이었습니다. 차라리 첩을 들일 바에야 자신이 잘 아는 아이가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김씨를 첩으로 들인 뒤에도 이방원과 민씨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오히려 첩 김씨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방원은 왕이 되자마자 궁녀들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취한 궁녀는 훗날 신빈으로 책봉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곳도 아닌 중궁전의 본방나인이었습니다. 본방나인이란 왕비가 사가에서 데려온 여종을 일컫습니다. 효빈 김씨와 마찬가지로 신빈 신씨 역시 민씨를 보필하던 여인이었는데, 이방원이 또다시 왕비의 측근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궁 신씨가 임신 중일 때, 태종은 또 몇 명의 궁녀들과 동침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민씨는 왕과 동침한 궁녀들을 중궁전으로 불러들여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접한 태종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중궁전에서 일하는 시녀와 환관 20여 명을 내쫓아버렸습니다. 중전의 손발을 다 잘라버린 것입니다.

이 사태가 벌어진 1401년 6월 18일부터 태종과 민씨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이후 태종은 보란 듯이 계속 후궁을 늘렸습니다. 그리고 1402년 3월 7일에 악공 권홍의 딸(의빈 권씨)을 후궁으로 삼으려 하자, 마침내 그녀는 폭발했습니다. 민씨는 태종의 옷을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민씨는 대전으로 쳐들어가 따지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식음을 전폐하고 분을 삭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태종은 권씨를 맞으려고 마련했던 가례색을 파하고 환관과 시녀 몇 명만 앞세워 권씨를 별궁에 들여야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왕비 민씨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태종은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1404년 8월 6일에 민씨의 장남 제(양녕대군)가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 해엔 막내 성녕대군도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태종은 몇 명의 후궁을 더 맞아들였고, 어느덧 후궁 수가 아홉 명에 이르렀습니다.

태종은 후궁을 많이 두는 것은 왕실의 자손을 융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둘러댔지만, 민씨는 수긍하지 않았다. 이미 얻은 후궁에게서 십여 명의 자식을 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후궁을 들일 때마다 태종과 민씨의 관계는 악화하였고, 급기야 태종은 신하들 앞에서 민씨가 투기가 심하다고 지적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에 민씨는 태종이 초심을 잃고 후궁에게 눈이 팔려 정사는 뒷전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아예 민씨 처소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태종은 민씨가 그렇듯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모두 민씨의 동생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륜, 이숙번, 이화 등과 짜고 민무구, 민무질 등의 처남들을 유배 보내버렸습니다. 이후 민씨 형제는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종친들과 세자의 장인인 김한로, 심지어 세자까지 민씨 형제를 죽여야 한다고 상소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10년(태종 10년) 태종은 마침내 민씨 형제 에게 자진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인이자 스승인 민제가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더는 눈치 볼 것도 없었습니다. 민씨 집안에 대한 응징은 그것으로도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6년 뒤인 1416년에 그들의 두 아우인 무휼과 무회에게도 자진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처자도 모두 변방으로 내쫓았습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있을 환란의 싹을 자른다는 차원이었습니다.

태종은 왕비 민씨의 집안을 처참하게 몰락시켰습니다. 그렇게 부부의 전쟁은 민씨가 죽은 1420년까지 지속되었으니, 두 사람의 애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만합니다. 부부의 전쟁은 칼자루를 쥔 남편 태종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세자 제의 아버지에 대한 소심한 복수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포스팅은 책 <조선 왕실 로맨스>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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